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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2년
발해 무왕이 장문휴(張文休)가 이끈 수군을 보내어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하여
자사 위준(韋俊)을 죽임(등주 공격)
*출전 : <<구당서>>, <북적열전> 발해말갈
733년
당나라의 요청으로 발해 공격을 위해 김사란(金思蘭)이 이끈 신라군이 출동하였으나 눈이 많이 와서 철수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32년 7월
733년
발해 무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마도산(馬都山) 일대를 공격함(마도산 전투)
*출전 : <<신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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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대조영에 의해 건국되면서 당나라는 발해를 국가로 인정해 주다가
719년 대조영이 죽고 무왕(대무예)이 2대왕에 오르면서부터
당나라가 발해를 돌궐,거란,흑수말갈과 동급으로 대하려 하는거임
(당시 돌궐,거란,흑수말갈은 정식 국가라고 안보고 부족으로 구분했음.
쉽게말해 당나라 빵셔틀)
무왕은 즉위하자마자 동북쪽으로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음
(신당서에 보면 "동북의 오랑캐들이 발해를 두려워 했다"라고 나옴)
722년 흑수말갈 부족장이 발해 영향권 안에(즉, 발해 빵셔틀해야함) 있어야 하는데
발해 몰래 당나라와 친목질을 시작함.
사진에서 보이듯이 당과 흑수말갈이 친목질을 하면서 발해는 위험을 느끼게 됨
(샌드위치 당할까봐..)
※ 돌궐과 거란은 발해와 우호적 관계였고 당과는 적대관계여서 괜춘했음
그래서 흑수말갈에게 당이랑 친목질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데도
흑수말갈은 무시하고 발해한테는 조공도 안바침
(당나라한테는 굽신굽신)
결국 725년 당나라는 흑수말갈에 관청을 설치하고 관료를 파견시켜 다스리기 시작했음.
사실상 당나라가 흑수말갈을 흡수하게 된거임
이에 분노한 무왕은 왕위계승자인 대도리행(무왕 아들)을 당에 보내어
흑수말갈한테 관심 꺼달라고 부탁함
하지만 당 현종은 걍 무시;;
참을수 없었던 무왕은 결국 흑수말갈을 토벌하기로 마음먹고
가장 신뢰하는 장수 대문예(무왕 동생)에게 흑수말갈 토벌군 사령관에 임명함.
근데 대문예는 입장이 달랐음.
이해를 돕기위해 대화체로 싸질러보겠음
무왕(대무예) "흑수말갈은 이제 당나라속국이 되었으니 당과 연합하여 발해를 공격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흑수말갈 토벌해야함, 니가 가서 조지고 와라"
대문예: 형님 지금 장난하십니까? 당나라는 발해의 몇배에 달하는 군사를 보유했다구요
아무일도 아닌데 괜히 흑소말갈 건드렸다가 발해 멸망할일 있어요??
(대문예는 당에서 8년동안 생활한 경험이 있어서 친당파였음)
무왕 "좆까, 지금 안치면 우리가 망함, 니가 언능 가서 토벌하고 와라"
대문예"....아 ㅅㅂ 꼭 가야되나?"
결국 대문예는 흑수말갈 토벌군 사령관으로 강제임명되고 흑수말갈을 토벌하기위해 동북으로 향했음.
하지만 국경지대에서 싸움은 안하고 계속 무왕한테 못싸우겠다고 상소를 올림.
(상소 내용: "아무래도 이건 하극상임 나 못하겠음")
빡친 무왕은 대문예를 소환하기로 하고
대신 사촌형 대일하를 토벌군 사령관으로 보냄.
근데 소환하기로 한 대문예가 발해로 안오고 당으로 망명해버림;;;
그리구선 당 현종 밑으로 들어감.
당 현종은 대문예를 발해 내정간섭에 써먹으려고
환대하며 벼슬까지 내림..
그리고 무왕한테
"대문예도 넘어왔는데 우리 당나라랑 너희 발해랑 임금 신하 관계로 친하게 지내지??"
이런내용의 국서를 보냄
당황한 무왕은 단호한 결정을 내리고 이렇게 답문을 보냄
"당에 망명한 순간부로 그는 내 동생이 아니다. 그를 죽여라"
당 현종은 약점잡힌 무왕이 굽히고 들어올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단호한 답변을 보고 당황함..
그래서 "대문예를 죽이기 위해 멀리 귀양보냈다."
라고 구라치고 지방에 숨겨놓음.
근데 얼마못가 무왕이 구라라는것을 알아차리게 되고
국서에 유례없는 내용을 써 넣음
"큰나라는 신의를 보여야 하거늘 어찌 속일수가 있소이까? 바라건데 예전의 청대로 그를 죽여주십시오"
생긴지 30년 갓 지난 신생국가가
동아시아를 장악한 당나라의 임금한테
구라쟁이라고 꾸짓은거임;;
당 현종도 뻘쭘해서 당분간 발해에게 아무것도 못했으나
728년 4월,
왕위 계승자였던 대도리행이 당에서 갑자기 사망하게 되면서
당나라의 태도는 180도 변해버림.
발해에게 협박하기 시작하게 됨
"내가 지금껏 참아왔으나 너희 나라가 점점 기어오르는것 같구나
왕위 계승자도 죽은마당에 대문예를 후계자로 정하도록 해라.
한그러면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발해의 왕권 자체가 흔들릴수 있는 상황
무왕은 결단을 내려야 했음.
이렇게 당나라의 속국이 될 것인지
아니면 당에 맞서야 할지..
결국 무왕은 압록강으로 군사를 이동시키고
박작구라는 포구에 발해군을 집결시켰다.
당나라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무왕은 장문휴장군에게 당 정벌을 명하고
장문휴 는 수개월동안 군선과 군사를 정비해 출격 준비를 마쳤다.
732년 9월 드디어 출격 명령이 내려졌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해외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목적지는 중국 산동반도 등주라는 지역이었다.
(등주의 모습 성 자체가 배를 정박하는 수성이라 전투하기 까다로움.)
등주는 당시 북방지역에서 가장 큰 항구로 무역의 거점이었고.
동시에 당나라 수군의 핵심 요충지였다.
(전국의 조선기술자들이 이곳에 집결했으며 물자를 들이고 군선을 만드는것 모두가 등주에서 이루어졌을 정도)
그런 요충지를 공격하는것은 매우 위험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큰 치명타를 줄수 있는 장소였다.
발해군의 작전은 기습적인 상륙작전과 선제공격
732년 9월 5일 발해군은 마침내 등주를 침공했다.
그 결과 등주 일대의 군사와 행정을 총괄하던 등주자사 위준을 죽임
(포로로 잡은것도 아니고 그자리에서 죽여버림)
당황한 당 현종은 급하게 장수와 토벌군을 보냈지만 발해군이 다 전멸시킴;
결국 당나라는
신라의 선덕왕(27대 선덕여왕과는 별개인물, 37대 왕)에게 벼슬까지 높혀주면서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발해를 공격해 달라고 부탁했고
당 현종이 직접 장수까지 지명해서 싸우게 함( 김유신 장군의 손자 김윤중)
신라는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하러 북상함.
(일명 빈집털이)
등주에 머물던 발해군은 부랴부랴 본토로 돌아오게 되고..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신라가 날씨를 핑계로 싸우지도 않고 공격을 포기함
(눈이 너무 많이와서 춥다고 고스란히 돌아감)
당은 발해를 직접 공격하기로 하고 비수를 뽑아듬.
바로 대.문.예 (개객끼)
대문예를 중심으로 발해 토벌군을 꾸려서 무왕과 맞서게 만든거임
당의 장수가 된 대문예는 동족을 향해 칼을 휘둘렀고 명백한 반역자가 되버렸음
이에 무왕은 암살단을 조직해
대문예를 죽이도록 계획하여 당나라 낙양 한복판에서 암살을 시도함.
결과는 Fail..
하지만 당나라 도시 한복판에서 발해 자객의
암살시도가 일어난것에 빡친 당 현종은
발해의 자객을 모두 잡아 처형시킴
(이 결과 대문예는 발해 토벌에 겁을먹고 숨어버림)
그리고 무왕은 다시한번 결단을 내리게 됨.
저번에는 해로를 통한 공격이었고
이번에는 육로를 통한 공격을 계획한거임
733년
육로를 통한 공격. 바로 마도산 전투였음
이번에는 장수에게 임명하지 않고 무왕이 직접 전투에 임하여 마도산으로 진격해 나갔음.
당나라는 마도산 일대를 지키기 위해 계속 군사를 파병했지만
파병하는 족족 왕이 직접 이끄는 발해군에게 발려버림
(밑빠진 독에 물 붙기)
(한번 전투가 있을때마다 당나라군만 6000명에서 10000명씩 죽어남)
(당시 발해군의 상상도)
발해군과의 전투에 임했던 당나라 장수는 당시 전투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결국 마도산 일대의 당나라 군사는 모두 전멸했고
남은 군사는 마도산에 남은 인원 뿐이었다.
발해군이 만리장성까지 육박한 상황에서
남은 당군의 생존자 수는
전면전도 할수 없을정도로 발해군보다 못 미쳤다.
결국 당나라 군은 발해군과의 전면전과 토벌시키려던 목적을 포기하고
(토벌은 둘째치고 지들이 죽게 생겼는데ㅋ)
지형지물(마도산 일대는 돌이 많음)을 이용해 버티기에 들어갔다.
당나라군은 돌을 이용해
400리에 이르는 장벽을 쌓고 마도산에서 꼼짝 않고 버텼다.
한참동안 마도산에서 당나라군과 발해군은 대치하게 되고
결국 당 현종은 무왕에게
발해를 개별 국가로 인정하는 것과
내정간섭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게된다.
그 결과 발해는 당의 영향을 받지 않은 발해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으며
더불어 70년 뒤 발해는 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최 전성기 당시 발해는 해동성국이라 불리게 됨)
그리고 등주 공격을 계기로 741년까지 흑수말갈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지 못했다.
무왕은 당시 최강대국 당나라를 상대로 전쟁도 마다치 않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당나라가 발해를 결코 얕잡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마무리: 736년 무왕과 당나라는 서로 화해하게 되고
737년 무왕의 아들인 대흠무가 3대왕에 오르면서 당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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