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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전쟁사

임진왜란 3대 대첩 - 진주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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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대첩>


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고 불리는 혈투. (나머지 둘은 한산도 대첩, 행주 대첩)


1952년 음력 10월 4일 ~ 10일. 



조선군 - 수장 : 김시민

                                

            진주성 수비군 + 의병 연합군 3800명



vs



일본군 - 수장 : 우키타 히데이에


            진주성 공격군 30000명




[전투 배경]


우선 1592년 6월 이후, 이순신 장군의 해로 차단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약으로 조선군은 철저한 수비전에 돌입.


일본군은 이에 북진의 기세가 꺾이고 경상도를 털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


그러다가 결국 육로로 서진하여 전라도 쪽으로 진입하려 했지만 


<진주성>에 가로막혀 진격을 멈출 수 밖에 없었지.







당시 일본군은 진주성에 경상도에서 퇴각한 병력 대부분이 모여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공격하기로 결정하지.


그러나 진주성을 둘러싼 남강을 건너 공격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사천성을 공격하여 공격의 거점으로 삼으려 하지만






김시민 장군이 1천명의 병사로 사천성을 기습, 격파하여 왜적 2천을 죽였고


그대로 나아가 고성, 진해를 탈환함으로써, 진주성 외곽의 위험 요소를 모두 제거하는 공을 세우지.


이 전공으로 조정은 김시민 장군을 진주성의 <목사>로 임명하여, 

사실상 진주 일대의 군권을 모두 위임하게 돼.






이것 때문에 빡친 일본군은 결국 3만의 대군을 싹싹 긁어모아 진주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지.


진주성에 있던 경상군 주력을 박살내면, 주변의 소규모로 항전하던 의병과 산개 부대들이 모두 겁을 먹고


퇴각할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하지만 왜군들의 생각과는 달리 진주성에 있던 군대는 경상도 주력군이 아니라


전라도 지역에서 생존한 잔존 병력, 그리고 약간의 의병 부대 뿐이었지.


그 조차도 도합 병력이 4천이 되지 않는 3800명이었어.



게다가 결정적으로 진주성에 본래 있어야 했던 전라도 방면 군대와 진주성 목사 <이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그대로 지리산으로 도주해 버렸지.


조정에서 이경에게 돌아가 성을 지키라고 했지만 이경과 그 부하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조정은 고성, 진해에서 공을 세운 김시민을 임시 방편으로 목사로 임명,


병력 한명 지원없이 진주성을 수호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거야.






김시민 장군은 목사로 임명되자마자 주변의 군세를 회복하고,


화약 무기를 비축하거나 갓 병사로 징집된 농민병을 훈련시키는데 주력했어. 그리고


전라 의병장 최경희


경상 의병장 곽재우




위와 같은 의병들을 모아 전투를 대비했지.


그리고 성을 버리고 도주하거나 와해되기 직전의 군민들을 설득해


간신히 수성 준비를 마쳤어.


그리고 1592년 음력 10월 4일...




우키타 히데이에가 지휘하는 3만의 병력이 진주성 앞에 당도했지.




<10월 4일 ~ 10월 5일>


뒤늦게 진주성에 경상 우병사 유숭인의 군대 1천이 도착했지만


김시민은 지휘 계통에 혼선이 생길까 염려하여 이들을 성 안으로 들이지 않았어.






그리고 뒤이어 일본의 선봉 1만명이 도착했고,


성 밖에 남은 유숭인의 병력 1천은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멸하지.






"우리의 분전이 진주성 사수에 작으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오리다. 무운을..."



<10월 6일 - 일본군 본대 도착>






일본군의 본대가 도착하고


1만명의 일본군이 후방으로 진입해 진주성을 포위했지.


하지만 후방 뒷산에 소수의 조선 의병 게릴라 부대가 분전하고 있어서 곧바로 양동작전을 걸진 못했어.


왜군의 본대가 도착하자 진주성은 공포에 빠졌고


급조된 군대와 엉성한 의병대는 점차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지.






김시민은 이들을 설득해 전투 준비를 갖추고


백성들에게 군복을 입혀 성벽에 배치해 숫자가 많아 보이게 만드는 작전을 썼지.


또한 곽재우의 의병은 전날 성 밖으로 나가 왜군을 교란하는 임무를 수행했어.







주로 일본군 후방에서 피리를 불거나 횃불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일본군의 시선을 분산시키는데 주력했지.


일본군 역시 심리전을 사용했는데, 주로 일본의 도깨비 (오니) 복장을 한 병사들이


붉은 깃발과 칼을 들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성 밖에서 달밤의 체조를 벌이는 등 공포감 조성을 시도했지.








그리고 마침내 10월 6일 첫번째 교전이 시작되었어.


우선 일본의 철포병들이 일제 사격을 가하자, 이에 놀란 조선군이 침묵했지.


기세가 오른 일본군이 돌격을 시도했지만








성 내부에서 일제히 <현자총통>을 발사해 왜군 수백명이 피떡이 되어 날아가버리지.


당황한 일본군은 근처의 민가를 약탈해서 방패와 대포막이를 만들어 공격을 시작해.


하지만 조선군의 화력에 피해만 잔뜩 입고 별다른 이득 없이 철수하고 말지.


결정적으로 곽재우가 2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성 밖에서 피리를 불며 적을 교란시키자


성 내부의 장병들이 이에 호응하여 환호하지.


이에 일본군은 급습이 들어오는 걸로 착각해 혼란을 일으키다가 결국 퇴각하게 돼.




<10월 7일>


마찬가지로 일본군은 1만의 병사로 공격을 감행했지만 


진주성의 병사들은 침착하게 잘 막아냈지.


밤이 되자 김시민 장군은 심리전을 썼는데








한밤중에 성루에 기녀들과 악공들을 불러


거문고와 퉁소를 연주하게 하여 일본군을 당황하게 만들고 아군의 사기를 높였지.


이에 일본군도 질세라 심리전을 동원했는데








조선의 어린아이들을 포로로 붙잡아 성 앞에 세워놓고,


뒤에서 칼을 겨누고 이렇게 말하게 했어.


"서울이 이미 함락되었고, 팔도가 붕괴되었습니다. 아저씨들이 새장 같은 진주성을 어떻게 지키겠어요?


빨리 성문을 열고 항복하세요!"


이에 조선군 측에서 약간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김시민 장군이 수습하여 성을 진정시켰지.



<10월 8일>







마침내 3만의 일본군이 앞뒤에서 맹렬하게 총공격을 감행해.


진주성이 함락 직전까지 갈 정도로 위급한 순간이었지.






전투 도중에, 진주성은 화살이 떨어지는 바람에 병사들은 돌을 던지며 싸웠지.


겨우 해가 지고 전투가 중단되었어.


그리고 역시 밤이 되자 곽재우의 의병 별동대가 횃불을 들어 수비군을 응원하고


왜군의 본진에 기습을 가해 왜군을 혼란에 빠트리는 데 성공하지.


이에 일본군은 진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의병 부대의 협공>이라고 판단하고 작전을 변경해.




<10월 9일>







일본군은 공격군을 다수의 분대로 재편성하고


이를 진주성 사방에 뿌려서 흩어져서 게릴라 공격을 벌이는 조선 의병들을 섬멸하기로 하지.


하지만 이 작전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는데


우선, 의병장 곽재우, 김준민의 부대가 소수로 나눠진 일본군을 여러 차례 각개격파에 성공하고


전라 의병장 최경희의 부대가 기습 공격에 성공해서 1천의 일본군을 죽이는 등, 대활약하지.


결국 일본군의 산개 수색작전은 대실패.


오후 쯤 다시 정공법으로 공성에 들어가지.







일본군은 대나무 다발을 이용해 성에 접근한 다음


토산을 쌓고 그 위로 올라가 진주성 안으로 포락을 던지고, 총을 발사했지.


그러는 동안 사다리병이 진주성에 접근하는 작전을 감행했어.


하지만...






우리에겐 이게 있잖습니까.


김시민 장군은 만약을 대비해, 주력 군대의 화약 외에


진주성 지하에 <화포 170대와 화약을 미리 비축해 두었지>


결국 화력이 떨어졌을걸로 예상하고 접근한 일본군은 그대로 조선군의 대포알 세례를 맞고


그야말로 처절한 고깃덩이가 되어 대패.


이에 격분한 일본군 대장은 새로운 작전을 내는데







일본군 수장 우키타 히데이에



공성으로 성을 뚫을 수 없으니, 거짓 퇴각으로 진주군을 성 밖으로 유인하겠다는 작전을 세우지.


그날 밤 가짜 횃불을 여러개 밝혀 놓고 일본군은 퇴각해.


이에 조선군이 나가서 추격하려 하지만







"내일 일본군이 총공격을 한대요."


왜군에게 붙잡혀 있던 한 조선 아이가 탈출에 성공해서 성 안에 이 사실을 알리지.


그 덕분에 조선군은 추격을 멈추고, 일본군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았어.



<10월 10일>







마침내 10일. 일본군이 모든 걸 내던지고 총공격을 감행하지.


성 안의 물자와 병력이 소진된 진주성은 결국 성문이 파괴되고 

성곽 일부가 무너지면서 뚫리고 말아.


하지만 하늘이 도운 것일까







밤이 되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일본군의 철포가 무력화되면서 수비군의 피해가 줄기 시작했어.


결국 성내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백병전이 전개되었지.


김시민 역시 직접 칼을 뽑아들고 전투에 참가할 정도로 혈투가 벌어졌지.


그러나 그때,






시체 속에 죽은 척 하고 숨어있던 일본군의 철포병이 간신히 불을 붙이고 총을 발사.


그 총알이 김시민 장군의 이마에 그대로 날아가 명중하고 말아.


의식을 잃고 쓰러진 김시민 대신


곤양군수 이광악이 지휘를 맡아 조선군을 이끌었지.






결과는 조선군의 승리.


10일 오전 11시 경 쯤, 일본군은 생존자를 건져 퇴각했어.


조선군 역시 피해가 막대했기에, 추격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그대로 성을 지켰지.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지만


진주 목사 김시민은 2개월 동안 의식불명에 빠져 있다가


결국 머리에 박힌 총알 때문에 숨을 거두고 말지.




<전투 결과>


조선군이 3800명 중, 2천 명 이상이 전사하는 등 아군의 피해도 컸지만


일본군의 경우,


분대장 급의 지휘관 300여 명,


전사자가 1만명을 넘고, 부상자는 수천이 넘을 정도로 막대한 병력 피해를 입고 말았지.


이 전투로 왜군의 전라도 진격과 수군, 육군의 상호 연계 작전은 영원히 좌절됐다고 봐도 무방해.


훗날 격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복수전을 지시하고


결국 2차 진주성 전투때 진주성은 함락당하고 말지.


진주의 유명한 <논개>가 이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이름을 알렸어.


아무튼 그건 2차 전투의 이야기고.


1차 전투에서 김시민의 활약은 엄청났기에, 


일본의 문학에서 <목사>라는 괴물이 등장하는데, 이 목사가 바로 진주성의 김시민 장군을 의미하는 거지.






김시민 金時敏

(1554~1592)


선무 2등 공신. 시호는 충무(忠武).


3800의 병력으로 3만의 일본군에 맞서, 진주성을 지켜냈으나


마지막 혈투에서 적의 유탄에 머리를 맞아 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