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에서 동북쪽 26km 지점에서 북괴가 뚫어놓은 4번째 땅굴이 발견된다.
당시 강원도 쪽에는 땅굴이 없을 거라는 예상을 뛰어넘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에 대한민국 국군은 역갱도 작업으로 땅굴의 탐색을 시작,
이듬해 1990년 3월 3일. 작업이 완료되면서 땅굴 수색 및 북괴군 소탕 작전이 시작되었다.
제 1땅굴 발견 당시, 국군은 3명이 전사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제 2땅굴 수색 작전에서는 김호영 중사 외 7명이 북괴가 설치한 부비트랩에 의해 순직했을 정도로
땅굴 수색 작업은 대단히 위험한 작전이다.
이에 국군은 수색 분대에 군견 한 마리를 딸려 보낸다.
제 4 땅굴 투입 직전의 수색대원들 모습
군견의 이름은 헌트.
독일산 셰퍼드 종으로 당시 나이 4세였다.
헌트의 임무는 수색대원들과 함께 북괴의 땅굴로 진입,
유독가스와 부비트랩을 감지하고, 대원들보다 앞서 땅굴로 들어가는 임무를 맡았다.
뛰어난 군견은 나무가 우거진 5000평의 산악 지대에서 2분만에 목표물을 찾아낼 수 있으며
시속 60~70km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
수색대가 북괴의 제 4 땅굴로 진입하였고, 헌트 또한 그들보다 한발 앞서 투입되었다.
순조롭게 수색이 이루어졌고, 대원들은 점점 군사분계선 근처까지 접근했다.
그러나 분계선을 330미터 앞에 두고
대원들은 헌트의 이상 현상을 포착한 움직임에 수색을 중지한다.
그리고 헌트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땅굴 안쪽으로 들어갔으나...
축축하고 어두운 땅굴 속에 북괴가 설치한 부비트랩을 발견하고
이를 대원들에게 알리기 위해 돌아가려던 헌트는
그만 북괴가 설치한 수중 목함지뢰를 밟고 당일 12시 05분에 그 자리에서 산화하고 만다.
만약 헌트가 앞서나가지 않았다면, 밀폐된 공간에서 폭발한 북괴의 목함지뢰는
수색대원 1개 분대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갔을 것이다.
장렬한 산화로 임무를 수행한 헌트는 4월 1일. 유해가 수습되었고
제 4 땅굴 앞에 묘와 동상이 세워지게 된다.
그리고 죽음으로 장병들을 구하고 조국을 위해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
<인헌무공훈장>을 받고, 군견으로써는 최초로 <소위>로 추서되었다.
<건립 취지문 본문>
적이 파 놓은 땅굴을 소탕하기 위하여 군견을 앞세운 수색팀은
1990년 3월 4일 자신의 목숨을 조국의 품에 맡긴 채 만행의 현장에 대한 작전에 돌입했다.
평화의 땅을 적화 통일시키겠다는 북괴의 흉계는
땅굴 벽에 써 놓은 "오직 혁명을 위하여"라는 그들의 선동 구호에 잘 나타나 있다.
적의 유독가스와 지뢰매설이 예상되는 암흑같은 갱도 내에서 수색팀은
군사 분계선을 불과 330미터 남겨놓은 지점을 통과하고 있었다.
전방에 설치된 적의 장애물과 지뢰로 인해 수색팀이 일단 정지하자
훈련된 군견은 지뢰의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 앞으로 뛰쳐나갔다.
질척거리는 수렁을 통과하는 순간
고막을 찢는 듯한 폭음과 함께 군견은 적이 묻어놓은 수중탐지 지뢰에 의해
동일 12:05분에 산화함으로써 대원들의 희생을 대신했다.
죽음으로써 장병들의 생명을 구하고 영광된 조국을 지킨 군견을
"충견"이라 칭하여 여기에 묘를 세운다.
<충견지묘>
헌트 소위의 동상은 정면이 아닌 북쪽을 응시하면서 만들어졌다.
언제나 조국을 수호하며, 북쪽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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