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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사

이순신 장군 스페셜 1부 (임진년 전설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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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忠武公 李舜臣
1545.3.8(음력)~1598.11.19(음력)


유명수군도독 조선국 증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덕풍부원군,

행 정헌대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석 자 칼로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다(三尺誓天 山河動色, 삼척서천 산하동색)"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다"(一揮掃蕩 血染山河, 일휘소탕 혈염산하)"







게임 대항해시대 이순신

 

 

이순신 장군의 어린 시절~청년기 이야기는 생략할게.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에서도 다룬 부분이고.

 

또 이 게시글은 이순신 장군의 전투에 대한 글이 될 거라는 걸 미리 말해둘게.

 

 

 

 

(파워 압축 스토리)

 

우선 32살에 무과에 늦깍이로 급제한 이순신은

 

북방의 여진족들을 조금 상대하다가

 

불알친구인 류성룡의 천거로 포풍같은 승진을 하게 되지.

 

이런 저런 인사발령에 휘둘리던 이순신은 마침내 자신의 전설을 알릴 무대인 바다에 도착해.

 

1591년 47세로 정3품 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던 거지.

 

당시 전라 좌수영은 5과 5포. 즉 5개의 고을과 5개의 군사 기지를 담당하던 군단으로

 

충무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병력을 증강시키고, 배를 건조하고, 

또 거북선의 제작에 들어가는 등 전력강화에 힘쓰지.

 

그리고 마침내 올 것이 왔어.

 

 

 

 

<임진 왜란 발발.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만의 대군을 이끌고, 군대를 3개로 나누어 조선을 기습공격하였지.

 

당황한 조선군은 도미노처럼 줄줄이 박살나고

 

결국 전쟁 발발 20일만에 한양이 함락당하는 수모를 겪지.






"이 새끼들이?"






"내가 직접 나서겠다!"

 

 

드디어 전쟁 발발 1달 만인 5월 4일.

 

영광의 이순신 함대 첫 출격.

 








여기서 잠시 이순신 장군의 전술의 핵심을 말해보자면

 

바로 "전투의 우위성을 선점한다"

 

이순신 장군은 언제나 전투에서 조선 수군의 수적, 화력의 우위를 준비한 다음 전투에 나섰고

 

어쩔 수 없이 전력이 대등 또는 열세인 상황이라면 첩보, 전술, 지형 등

 

가능한한 모든 이점을 총 동원해서

 

아군의 피해는 최소로, 적의 피해는 최대로, 전투 시간은 최단으로, 전투 피해는 최장으로

 

이 모토를 유지했지.

 

 

 

 

<옥포 해전> 5월 4일






첫 출전. 옥포만에서 토도 타카토라의 선단과 마주함.

 

교전 끝에 왜선 26척 전원 침몰시킴.

 

아군 피해 : 부상자 2명

 








헐 시발...

 

돌아오는 길에 적진포와 합포에 들려

 

각각 왜선 5척과 15척을 침몰시키고 전라 좌수영으로 귀환.

 

 

(최종 결과)

 

조선군 피해 : 0척, 2명 부상

 

일본군 피해 : 46척, 6920명 전사.

 

 

 





 

 

 

<사천 해전> 5월 29일






이순신과 원균의 함대 26척이 출격.

 

사천에서 왜선 13척을 전멸시킴.

 

이때 거북선이 실전에 투입됌.






철갑으로 무장한 돌격선 거북선의 난입으로 왜군은 혼비백산.

 

처절하게 짓밟히며 2연패.

 

이 전투에서 충무공이 적탄에 피격당하는 사고가 일어남.

 

 

(결과)

 

조선군 피해 : 0척, 전사자 없음. 부상자 : 이순신(사령관), 나대용

 

일본군 피해 : 13척, 2600명 전사.

 

 

 

 




 

 

<당포 해전> 6월 2일






당시 조선군 주력함대 판옥선.

 

 

왜선들이 당포에 오밀조밀 모여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출진.

 

구루시마 미치유키의 함대 21척을 전멸시킴.

 

왜장 구루시마 전사.






어허헣헝행러허아헝나런마얾올 ㅠㅠ 나 주금 ㅋ

 

 

 

당포 해전 승리 후, 다시 수색선을 사방에 뿌려

 

왜선들이 당항포, 율포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포착.

 

곧바로 출격하여 당항포에서 39척, 율포에서 7척을 격침시킴.

 

당당히 전라 좌수영으로 귀환하고 이 공으로 8월 16일 자헌대부 승자를 하사받음.

 

 

(최종 결과)

 

조선군 피해 : 0척, 전사 11명.

 

일본군 피해 : 당포, 당항포, 율포 합쳐서 67척 침몰, 8140명 전사.

 

 

 




 

그리고 7월 4일.

 

이순신 한산도로 출격!





2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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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

 

* 이순신의 키는?

 

- 한때 2미터 50센티라는 학설이 돌았으나, 개소리로 판명났고.

 

   당시의 조선인 평균 신장과 이순신의 남아있는 갑옷의 크기로 분석하여

 

   약 6척 (180cm)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다만 이순신의 장군도가 2미터에 달해서 이런 이순신 거인설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 백성들에게 이순신 장군이란?

 

- 부임 초기 : 지독한 관리

 

- 임진왜란 개전 : 존나 지독한 관리

 

- 투옥된 후 : 그리운 임

 

- 백의종군 : 존나 지독하지만 그래도 그리웠던 임.

 

 

이순신은 스스로가 완벽주의를 추구했으며,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다스리던 전라 좌수영의 5고을 백성들은

 

거의 매일같이 이순신의 징집에 응해 수군 훈련을 받고, 노가다로 끌려 나와 배를 건조, 수리하는데 동원되었다.







심지어 자신의 휘하에 있던 병력을 차출해 간 사명대사를 <치졸한 중놈>이라고 욕하며 분노하기도 했다.






"순신, 이러기야?"

 

또한 강제로 끌려와 혹독한 훈련을 받다가 병사들이 탈영하면

 

그의 가족들을 끌어와 엄히 처벌했으며,

 

규율을 강력하게 적용해 수많은 병사들을 전쟁 일어나기도 전에 처형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수군들은 이순신을 "능력있지만 너무 지나친 장군님"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훗날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말아먹고 백성들이 다 죽게 생기자

 

 백성들은 그제야 충무공의 위대함을 알고 장군이 돌아오자 울며 절하고 기뻐했다고 한다.

 

 충무공이 돌아오자 '원균의 살점을 강제로 뜯어서라도 먹고싶다'고 하는 등 원균을 철저하게 증오하며

 

 '장군께서 오셨으니 우리는 살았다'는 등 충무공의 귀환을 진심으로 반겼다고 전해진다.